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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각

미국사는 한국아줌마 2023. 8. 10. 12:26

한국서 걸려온 오빠의 전화에 직감했다. 서둘러 비행기 표를 구하고 옷장서 검은 옷 위아래로 골라 입고 장례식을 위해 떠났다.
 
돌아가시기 한 해전 치매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혹여나 나이 든 딸을 못 알아보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병실 문을 들어설 때 가슴이 조마조마했었다. 저 사는 것에 급급해 무심했던 딸, 어제 본 듯 그렇게 웃으시며 맞아주시고 미국서 온 딸이라고 자랑하셨다. 아주 오래간 만에 본 딸, 멀리서 온 딸을 기쁘게 해 주시고자였을까, 아니면 어린아이가 되어 자랑하고자였을까. 엄마는 소리 내어 성경을  읽으셨다. 성경책을 거꾸로 들고. 엄마는 글을 모르시는 분이시다. 조금씩 배워가시며 아주 천천히 읽으셔야 무슨 말인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날 엄마의 성경 읽기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 있게 빨리 읽어 내려가셨다. 나는 엄마를 칭찬해 드렸다. 너무 잘 읽으신다고. 예전에 나는 종종 엄마에게 성경을 읽어드렸다. 엄마는 항상 칭찬해 주셨다. 어쩌면 그렇게 잘 읽느냐고..
 
초등학교 다녔을 때였다. 까닭 모르게 심하게 아팠다. 엄마의 뜨거운 눈물 방울이 내 볼에 떨어지면서 의식을 차렸던 것 같다. 밤새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그제야 가늠할 수 있었다. 새벽녘 다락방 작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희미한 빛으로 나를 붙들고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 아이는 내 딸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딸이니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 " 그 후 수십 년이 지나간 지금까지 그 눈물방울의 온도와 그날 새벽녘의 기도의 간절함이 잊힐 수 있을까. 말을 할걸 그랬다. 그래서 그날 내가 살았다고. 그 후로도 살고 싶지 않은 날들 있었어도 그래도 살아냈다고. 그 어둠 속 엄마의 눈물방울은 내 가슴에 뜨겁게 새겨졌고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나곤 한다. 자랑할 것 없고 부끄러워도, 그래도 존재의 자부심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날의 기도가 나를 그렇게 붙들고 끌고 왔다는 것을 말할 걸 그랬다. 
 
칠월 중순. 분명 여름이었을 텐데, 다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화장터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그리고 버스서 내려본 내 인생에 처음 가본 화장터,  한참 울다가 내린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인생의 피 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로 아파하며 절규와 비명,  목탁소리, 찬송소리, 여기저기 자신들의 종교로 예배하며 위로를 얻고 있었다. 이런 것이었구나. 육체는 나무관 속에서 함께 불타고... 일반 장지에서와는 달리, 화장터, 그 자리는 더없이 힘든 자리였다. 
 
엄마의 관에 불이 댕겨졌을 때, 참으로 신기했다. 순간의 정적이 흐르는 듯했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우리에게 어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어머니로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납해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모든 걸 바라고 믿고 견디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여자인양 울다가 웃다가... 한 가지를 확인했다.  잃어버린 것이 아픈 까닭은 그만큼 사랑한 것임을. 내가 누린 것이 그만큼 큰 것이었음을, 그 가치는 상실했을때 가감없이 드러난다.

엄마의 성경을 들고 나는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족하고 잘못한 것이 형제들중 가장 많은 자식임에도 잘못한것 보다는 내가 빚진것들, 부모에게 빚지고 형제에게 빚진것들, 그 사랑의 빚이 생긱났다. 내 얼굴에도 엄마의 주름이 파이고 엄마가 내게 그러했듯 또 그 울타리안에서 형제들이 내게 그러했듯 힘겹도록 응원하고 싶다. 그런 삶을 살고 싶다.

5월 8일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직원들이 어르신들 앞에서 "높고 높은 하늘이라 ..." 합창을 했다. 80대 후반의  한 어머님이 눈물 흘리며 고개를 들지못했다. 그 모습을 앞에서 보면서 혹여라도 자식을 일찍 여의셨나 혹은 깊은 병상에 계신가 마음이 몹시쓰여 노래를 마치고 조용히 다가갔다. "왜 그리 많은 눈물을 흘리셨어요?" 조심스럽게 묻는 나에게 여전히 젖은 눈으로  "엄마가 생각나..."하셨다.
엄마생각은 온 우주의 몫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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