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인기를 끌고있는 <폭싹 속았수다>가 제주 방언으로 '엄청 수고 하셨습니다'라는 의미를 갖고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나 또한 <폭싹 속았수다>라는 제목을 처음보고 앞으로 펼쳐질 드라마의 시작이 '사랑에 속아서 치르게 되는 삶의 희비극'인가 했는데 '엄청 수고했다, 참 고생했다'라는 격려의 뜻을 의미하는 제주방언이라는 것이다. 전국민이 이 드라마덕에 제주방언 하나를 배우게된 의미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을 떠난지 근 30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서울말의 정서를 갖고사는 내게는 의도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는 제주도 방언의 원뜻과 쉽게 연결되지않는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의 눈물나게 하는 4대가 치르는 가족서사와 배우들의 섬세한 명품연기로 네플릭스를 통해 자랑스럽게도 다시한번 전세계에 K-드라마 인기몰이를 하고있으니, 미국사는 한국아줌마인 나도 그 흥으로 제목을 한번 더 생각해 보게된다.

미국에 사는 나로서는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으로 번역된 제목을 보았을때 오히려 드라마가 펼쳐질 이야기의 감을 잡는게 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영어에 'When life gives you lemon, make lemonades'라는 표현이 있다. 말 그대로라면 '삶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말인데, 처음 이 표현을 접했을 때도 레몬의 이미지가 상큼하고 예쁘고 신선하고 좋은 의미로만 갖고있던 나의 정서에는 시큼하고 피하고 싶은 상황을 레몬과 연결짓는게 수월치 않았다. 사실 머리로 생각해서 그 뜻을 추정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속뜻은 집집마다 있는 흔하고 값싼 레몬, 시큼해 한입 물면 얼굴을 찡그리며 돌려버리게 만드는 레몬, 산화된 상태의 물질이 내포하듯 원하지 않는 상황이나 골치거리를 말한다. 자동차보험에서 레몬법(Lemon law)도 거기서 나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살면서 진짜 얼굴을 찡그리며 돌려버리고 싶은 골치덩어리,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어진 상황을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고난과 어려움이 지나고보니 오히려 값지고 소중한 것이되어 그동안의 수고에 큰 보상이 된다는 격려의 말이다. 내가 원한건 달콤한 오렌지였지만 피하고 싶었던 시큼한 레몬이 덜컥 주어졌어도 원망하지 말고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보자. 시원하고 상큼한 레모네이드로 사랑의 인연도 생길 수 있고 친구와의 우정도 깊어질 수 있다. 피하고 싶은 인생의 어느길에서 내 스스로가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인정해 줄 수 있는 삶의 지혜이다.

드라마 제목의 번역가운데 레몬대신 귤(tangerine)로 바꾼것을 보며 드라마의 배경인 귤이 많이나는 제주도의 지방색을 그대로 살려준것도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묘미를 주었다.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삶이 네게 혹여 시큼한 귤을 주더라도 귤청을 만들어라' 이런 뉘앙스를 갖고있다 (내겐 귤이 언제나 맛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s'라는 표현을 이미 언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갖고있는 영어문화권에서도 영화전체내용의 핵심을 충분히 어필시킬 수 있는 번역이었다. 얼마나 산뜻하고 기지가 뛰어난 번역이었는지 감동했다.
K-드라마가 '오징어 게임'을 위시하여 전세계에 인기몰이를 하고있는 때이지만, 사실 각 나라 사람들이 갖고있는 언어와 정서에 공감되는 번역의 정도에 따라 그 인기정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번역이 주는 신의 한수가 바로 이것이다. < 폭싹 속았수다>가 네플릭스를 통해 전세계 각 나라로 번역이 되어 퍼져나갈 때, 각 나라만이 갖고있는 문화의 차이와 언어표현의 묘미를 살려 번역가들이 이렇게 멋스럽고 맛스럽게 했으니, 그야말로 번역가님들에게도 '폭싹 속았수다'를 이럴때 쓰면 딱 제격인 것이다.

